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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아: 국내 처음으로 ‘춤치료’ 도입한 괴짜 춤꾼

여성동아. 2004. 10 “노숙자, 알코올 중독자..상처 입은 이들을 신명나는 춤으로 치료합니다”

고등학교 때 탈춤반에 첫발을 디딘 이후, 춤에 미쳐 전국 팔도는 물론 영국까지 건너가 춤 구도(?)에 나섰던 박선영씨, ‘춤 유학을 다녀온 그가 선택한 무대는 노숙자와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길거리였다. “마음이 굳으면 몸까지 굳어버린다”며 몸은 물론 얼굴조차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을 유들유들한 춤 박사로 만들고 있는 춤 치료사 박선영씨의 남다른 인생 이야기.

“자, 오늘은 상대방이 거울 속의 나라고 생각하고 춤을 추는 겁니다.” 서울 태평동에 위치한 사회교육센터의 강의실. 일명 ‘춤 교실’ 이다. 하지만 현란한 사이키 조명과 요란한 음악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편안한 불빛에 모던한 음악이 깔리는 박선영씨(34)의 교실엔 평상복 차림의 학생들이 명상하듯이 춤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이건 ‘춤 세라피’ (www.whitedance.org)라는 수업입니다. 춤 치료라는 의미죠. 처음에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춤을 못 추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있게 춤을 춥니다.” 춤 교실은 몇몇 사람만 제외하면 ‘춤맹’ 집합소에 가깝다. 춤만 추면 로봇처럼 뻣뻣해지는 불치병 환자(?)들은 직장인. 주부, 학생까지 각양각색이다. 주부 진주씨(48)도 평생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춤의 ‘한풀이’ 를 하러온 경우라고 한다. “평생 제일 안 되는 계 춤이었어요. 항상 반듯하고 단정한 모습을 강요받다 보니까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렸죠. 나중엔 다른 사람과 악수하는 것조차 어색하더라고요. 제게 춤은 항상 ‘넘어야 할 산’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딸에게도 춤을 가르쳐 줄 정도니, 저도 믿기지가 않아요.(웃음)”

진씨처럼 ‘춤맹’ 을 자처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 옛날 <삼국지>에도 언급될 정도로 춤을 즐겼던 민족의 후예들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박씨는 “우리나라 춤문화의 현주소는 빵점에 가깝다”고 말한다. 춤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그저 ‘보여주려는 춤’ 에 급급하기 때문이라고. “선진국에 비하면 춤 문화가 거의 50년 정도 뒤져 있다고 봅니다. 선진국에서는 지역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춤 교실을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건 춤이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박씨가 춤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 탈춤반에 참가했는데,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 고 무섭게 탈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때 그 선택을 박씨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로 꼽는다. 반면에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자나깨나 소망한 아버지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멀쩡히 학교를 잘 다니던 아들이 갑자기 ‘판따라(?) 가 되었으니 그 반대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접골원을 하셨어요. 손님은 많았지만 무허가였던 터라 제가 정식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던 거죠. 요즘은 제가 춤으로 사람들을 치료한다고 해서 ‘춤 의사’라는 별명이 붙었잖아요. 아버지가 그 말 들으면 좋아하실 거예요. 어찌됐든 의사니까요(웃음).” 지금이야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신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는 아버지지만, 그때는 다시는 안볼 것처럼 불호령을 내렸다. 뜻을 어기지 못해 ‘한의학과’ 를 지원했지만 낙방. 목표를 수정하여 ‘수의학과’에 도전했다. 이러기를 거듭하다 결국 그가 들어간 과는 ‘낙농학과’. 지금의 그와는 전혀 생뚱맞은 전공이다.

“한데 저에겐 호재였죠. 그때 충남대엔 ‘탈춤 동아리’가 유명했거든요. 아주 신나게 학교를 다녔죠.”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수업은 빠져도 춤 동아리는 ‘개근’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 친구가 춤에 빠져 사는 그를 불렀다. ‘네 춤은 진정한 춤이 아니다’ 는 것이 친구의 힐난이었다. “80년대 대학가의 탈춤반은 이른바 ‘학생운동’ 을 목적으로 하는 동아리들이 대부분이었잖아요. 다른 친구들은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있는데, 저는 그 시간에도 춤을 추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거예요. 그러니 친구들사이에서 문제가 자꾸 생겼죠.”

박씨를 정식단원으로 입단시키기 위해 규칙 바꾼 대전시립무용단

그래서 군에 입대했다. 당분간 춤과 멀어지기 위해 들어간 도피처였지만, 도리어 춤에 대한 열정만 키우고 나왔다. 군대에서 나오자마자 팔도를 순례하다시피 하며, 춤 구걸(?)을 시작했다. 구걸’ 이라는 비유를 쓸 법한 것이 춤 하나를 배우려면 간, 쓸개를 다 빼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는 ‘하회별신굿‘ 의 인간문화재를 찾아가 넙죽 절을 했다. 춤을 가르쳐준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식수발은 기본인 호된 시간이었다. “가르쳐준다고 하지만, 제가 옆에서 해보고 ‘이거 맞나요? 라고 물어 보고, 아니라고 하면 ‘이거는요? 하고 물어보는 식이었죠. 그렇게 6개월쯤 매일 출퇴근을 했을 거예요.” 하나를 배우면 또 다른 춤을 찾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보자마자 ‘눈이 돌아버린 춤은 학춤’ 이었다. 한걸음에 부산에 내려가 학춤’ 의 대가인 김덕명 선생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학춤’을 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대답은 ‘절대불가’. 이미 그 선생 밑에는 10년 동안 ‘학춤’을 배우기 위해 공을 들인 제자가 있었으니, 자신에게 가르쳐줄 이유가 없었다. “원래 전통 춤은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에게만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니 저처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와서 가르쳐달라고 하면 가르쳐주겠어요?” 더 이상 ‘춤 동냥질’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뜻밖에 구원의 손길이 왔다.

“지금까지 배운 걸 가지고 개인 발표회를 했어요.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데 대전시립무용단 안무장이 제게 와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더군요” 사실 그가 ‘시립무용단’ 에 들어간 것은 ‘불법’ (?)이다. ‘4년제 대학’ 에서 무용을 전공한 사람만이 입단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대전시립무용단에서는 ‘비상임위원’ 이라는 새로운 자리를 마련했다. 일주일에 세번 무용단에 나가는 것으로 30만원의 수입이 생겼다. 춤으로 번 첫 월급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집에서는 ‘공무원’ 이 됐다며 좋아했지만 그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른 단원들은 다 무용학과에서 ‘신무용’ 이라는 과목을 배웠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전통 춤만 배우러 다녔잖아요. 그러니 제가 부족한 게 많았죠.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 나갈 걸 일주일내내 나갔어요. 가서 다른 단원에게 ‘신무용’ 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죠.” 아침에 시작한 춤연습이 오후 3시에 끝나면, 다시 ‘신무용’ 을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배웠다. 하루 종일 밥 먹는 시간만 빼고 녹초가 되도록 ‘춤’ 만 줬다. 그런데도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 가뿐했다. 꿈같은 나날이었다. 그렇게 훌쩍 1년이 지나가자 무용단 측에서는 다시 정식단원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다.

“제가 무용학과를 나오지 않았으니 원래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상하다’ 하면서도 시험을 쳤죠. 합격이 되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규정을 바꿨더군요. ‘2년제 대학 이상에서 무용을 전공한 자, 그리고 그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자’ 로요. 그 ‘동등한 자’ 에 들어간거죠(웃음).” 시립무용단을 하면서도 전통춤을 좇는 버릇은 여전했다. 그가 이번에 빠져든 것은 ‘살풀이’ . “살풀이에 대해 여름 워크숍이 있었어요. 오전, 오후반이 있었는데 욕심에 그 두 반에 다 들어갔어요. 하루종일 춤만 췄죠. 그렇게 나흘을 했더니 쓰러지대요. 그자리에서 응급실로 실려갔죠(웃음)” 춤 추다가 쓰러질지언정 그에겐 정말 ‘좋은 세월이었다. 매달 통장으로 돈이 차곡차곡 쌓였고, 새 차도 한대 구입한데다가 새 아파트까지 척하니 마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결혼하자면 응할 여자 친구까지, 모든 상황이 순조로웠다. 마음만 먹으면 ‘행복 시작’이었건만 그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4년 지나니까 시립무용단에서 차석 시험을 보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시험을 보면 붙을 것 같았고요. 그때 40대가 된 제 모습을 생각해봤죠. 무대 한 귀통이에서 소품인 깃발을 들고 있을 제 분명하다라고요. 그래서 다른 출구을 찾은 거죠”

‘모 아니면 도’ 라는 각오로 직장도 그만두고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집마저 팔았다. 배수진을 단단히 친 후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반벙어리가 오로지 손짓 몸짓으로 수업을 들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가 택한 전공은 ‘커뮤니티 댄스’.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이건 춤을 배우는데, 해부학이 나오고, 심리학자 칼 융이 언급되질 않나 아주 죽겠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수업시간에 들어갔는데 ‘가슴을 떨어라’ 하고 교수가 말하더군요. 몇 시간이고 그 동작을 하라는 거예요. 별 것 아니려니 하는데, 좀 있으니 학생들이 통곡을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구역질을 하고요. 그것은 몸을 움직이면서 몸 속 깊이 있었던 ‘아픈 기억’ 이 되살아나는 과정이라고 해요. 춤을 추고 난 후의 해방감이라고 할까….이걸 꼭 한국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힘들게 공부를 마친후 ‘득의양양’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술가들은 유학을 갔다오면 귀국 연주회나, 공연을 하는 것이 상례. 그러나 그는 처음 귀국무대를 ‘길거리’ 로 잡았다. “한국에 오자마자 프로그램을 짜서 ‘커뮤니티 댄스’를 시작했어요. 노숙자, 약물중독 청소년들에게 춤을 가르쳐주었죠. ‘나를 찾는다’ 는 컨셉으로요.“ 그러나 처음부터 수월하지는 않았다. 많은 것을 알려주고픈 그와 이미 의욕이란 건 말라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기란 수월치 않았다. 의욕을 갖고 시작한 일이지만, 철저하게 자신부터 깨졌다. “약물중독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한마디로 ‘박살’이 났죠. 이미 모든 것에 지쳐버린 아이들은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어요. 화요일마다 아이들을 만났는데 ‘이렇게 하자’ 해도 그냥 멀뚱하니 있어요. 소름이 돋더군요. 그 시간을 끝내면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어요. 그리고 다시 화요일이 다가오면 밥도 못 먹었어요. 잠도 못 자고 그 시간이 두려웠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이들의 변화가 느껴졌다. 춤을 주는 아이들과는 말도 나눌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끝까지 춤을 추지 않는 아이들은 그가 다가가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는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일수록 깊은 상처가 있다고 말한다.

“상처는 마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근육과 관절에 남아 있어요.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은 심장 깊숙이에 들어가 있어요. 춤을 추면 몸을 움직이니까 그 상처가 밖으로 나오게 되죠. 갑자기 춤을 추다가 펑펑 우는 것이나 웃는 것이나 다 상처가 몸 밖으로 나와 치료가 되는 현상입니다.”

노숙자들에게 자기 몸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싶어 춤 가르쳐

가장 춤을 가르치기 힘든 사람은 노숙자들. 춤춘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그들에게 춤은 한마디로 ‘소귀에 경읽기’. 그래도 조금씩 변화가 느껴진다고 한다. “노숙자들이 망가지는 건 ‘자신의 몸’ 을 하잖게 여기는 순간부터예요. 춤은 자기 몸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소중하죠. 그동안 함부로 굴렸던 자신의 몸을 느끼게 하는 것, 자신의 몸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하는 게 제 목적입니다.” 노숙자들의 얼굴은 절대 펴지지 않을 것 같은 바위와 같다. 그렇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도 춤을 추다 보면 점점 부드러워진다고 한다. 박씨는 그들이 완전히 신명나게 춤을 추는 날, 마음도 새롭게 변해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는 이제 노숙자와 약물중독 아이들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 정신질환자, 직장인, 종교인에게까지 춤세라피를 널리 전도(?)하는 중이다. 그들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라고 한다. 처음엔 “”전, 못해요”하고 빼던 사람들도 그와 한번만 ‘춤 세라피’ 를 하고 나면 ‘앵콜’ 을 외칠 정도라고. “신체이미지라는 게 있어요. ‘나는 뚱뚱하다. 나는 말랐다’ 등이죠. 이런 신체이미지에 지배당해서 춤을 못추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난 뚱뚱한데, 춤을 춰서 뭐해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한번은 장애인 여성에게 춤을 가르쳤는데 깜짝 놀랐어요. 훨체어를 탄 채로 너무나도 아름답게 춤을 추는 거예요. 그걸 보고 다시 느꼈죠.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추는 거구나 하고요.“

그는 현재 서울여대 특수치료전문 대학원에서 또 춤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정작 춤에 빠져 지내느라 여러 번 결혼할 기회도 놓쳤다는 그는 “춤이 마누라”라며 웃는다. 앞으로도 몸이 허락하는 한 춤을 추며 ‘춤 치료’를 계속 하겠다는 박선영씨, 대한민국 전체가 ‘춤 바다’가 될 때까지 그의 춤 전도는 방방곡곡 계속될 듯하다. 

■글· 조주화(자유기고가> 사진 · 박해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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